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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광장] 인문학(人文學)은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경북일보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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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바람이 봄꽃을 재촉하여 천지가 꽃향기로 가득하다. 매화를 시작으로 개나리, 목련, 수선, 난초, 벚꽃, 철쭉, 진달래가 치열한 춘투를 벌이더니만 세상을 꽃천지로 만들었다. 뒤를 따르는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빨간 꽃술을 뾰족이 내밀고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행인들을 유혹한다. 조만간 복숭아, 살구, 자두가 열매를 달고 봄맛으로 변신하게 되면 동장군도 겨울 무장을 해제하고 덩실춤을 출 것이고, 그때쯤이면 사람들도 겨우내 꽁꽁 얼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두런두런 봄 잔치를 벌일게다. 그러면 매섭고 잔혹한 우리 시대의 야만성도 봄눈 녹듯 녹고, 잃어버린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애틋한 정감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봄은 만병통치약이다. 봄은 천지(天地)가 피우고 사람들이 노래해야 완전체가 된다. 완전한 봄이 되면 본말(本末)이 뒤바뀐 세상도 정상적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쪼개지고 갈라진 사람들의 아픔도 봄이 되면 아문다. 그래서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이 봄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러려면 인문(人文)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門)을 열어주어야 한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자신도 세상도 밝아 보인다. 봄꽃이 오셨는데도 봄 인줄 모르고 봄과일이 유혹하는데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은 슬픔이다. 보릿고개의 배고픔보다 더 심한 아픔이다. 봄이 오면 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아무리 술(術)과 물(物)이 대세인 세상이지만 인간다움이 없으면 허사이고 가식이다. 급박하게 찾아온 인공지능, 로봇, 디지털 시대, 망망대해의 정보와 지식의 혼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네비게이터(navigator)는 인문(人文)이다. 인문에서 나를 찾아야 남도 꽃도 세상도 보인다.

그런 인문, 인문학이 천대받고 곡해되고 있다. 취업과 자기계발이라는 명목으로 죽은 동서양 철학자들과 문인들까지 소환하여 인문학 열풍을 만들고 있지만 실상은 일장춘몽이 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전국 방방곡곡 온갖 단체들이 개설한 인문학 강좌가 대학의 인문 학과들을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정작 인문 학과는 고사위기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취업률과 경제 논리로 학과와 대학을 평가하는 대학 현실에서 인문학은 구조조정 1순위 대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문학에 열광하면서 인문 학과를 없애려는 이율배반적인 모순이 나타난 것이다. 최근 인문학 계열의 상황을 보면 2000년 241,043명, 2012년 273,850명이던 학생 수가 2022년 208,787명으로 급감했다. 학과별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철학과의 경우 2011년 80개, 2016년 70개, 2021년에는 60개로 줄었다. 학생과 학과 수의 감소는 표면적이다. 인문학의 축소는 정신이 흐릿해지고 마음이 닫혀 야만과 분열의 시대가 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 준다. 결국 인공지능(AI), 로봇이 일상화되고 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이 사라지게 되면 인간은 로봇보다 천하게 될 수밖에 없다.

인문 학과들이 위기에 처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문학에 대한 사람들의 망각 때문이다. 마치 생존에 필수 불가결하지만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공기나 물처럼 인문학의 가치를 잠시 잊은 것이다. 돌이켜보면 인문학(humanities)은 수 천년 인간 역사 동안 사람들과 함께했다. 인문학은 흔히 인간과 인간의 근원 문제, 인간 가치와 인간만이 지닌 자기표현 능력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과 달리 분석적이고 비판적이며 사변적이어서 깊고 심오하다. 서양 인문학의 경우 로마시대는 4과(음악, 기하, 산술, 천문), 3학(문법, 수사, 논리)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문학 및 역사 분야로 전환되었다. 후에 인문학은 ‘자연학(Naturwissenschaft)’과 대비되는 ‘정신학(Geisteswissenschaft)’의 개념으로 정립되고 언어, 역사, 예술 등으로 확대되었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인간 전유의 영역이다.

인문학 위기의 또 다른 이유는 시대적 전환이다. 근대 시기 세상을 물질과 정신으로 양분했던 당시에는 인문학이 세계를 설명하고 사람들을 가치 있게 만드는 데 유용했다. 그러나 다양화되고 복잡해진 세계에서 인간에 대한 ‘실증’요구도 커지면서 인문학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다. ‘인간성’에 대한 신경과학이나 인공지능 연구가 등장하자 고전과 사상 중심의 기존 인문학의 영역을 벗어난 연구 방법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인문학기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인문학이 세상을 여는 새로운 문이 될 수 있다. 세계화 시대에서 세상과 통하는 인류 공통의 아이콘은 인간이다. 한국의 토종문화(K-pop, K-food, K-culture)가 세계인들의 공공재가 되고 있는 것은 놀고 먹고 즐기는 주체가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 법고창신(法古創新), 구본신참(舊本新參)을 생각하면 인문학은 고부가 가치산업으로 부상하는 문화 콘텐츠뿐만 아니라 상실의 시대, 시대적 야만성을 치료할 치료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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