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과 경제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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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매일신문) -
이정태(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십 수억의 사람으로 바글거리는 중국,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부단히 움직이는 군중을 어떻게 일일이 등재하여 세금을 부과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 호적등록제도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상나라(商代)시기였다. 서주(西周)시기에 이르러 성별과 지방(城, 鄕)에 따라 인구통계조사가 실시되고, 매년 출생과 사망을 기록하는 등 원시적인 호적제도형식이 갖추어졌다. 춘추전국시기 전쟁이 빈번하게 되자 국력과 직결된 인구에 대한 관리가 강화되었다.
진나라의 전국통일 후에는 지역(社區)조직을 이용한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십오편제(什伍編制)를 적용하여 연좌제도를 실시하였다.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한하였고, 이사를 원할 경우 지방관리에게 호적변경신청을 하도록 하였다. 진한위진(秦漢魏晋)시기에는 향리제(鄕里制)를 실시하고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통제하였다. 당나라 때는 다섯 집을 한 보(保)로, 네 집을 한 린(?)으로, 백호를 한 리(里)로, 오백호를 한 향(鄕)으로 묶은 향보제(鄕保制)를 실시하였고, 관리자인 이장은 호적등록의 진위를 검사하고 부역과 조세를 재촉하는 역할을 맡았다. 송나라 때는 보제(保制)를 시행하였다. 같은 보에서 강도, 살인, 방화, 강간, 약탈, 사이비종교 전파, 가축독살 등이 발생하였는데도 보 내의 사람들이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으면 오보법(五保法)에 따라 처벌하였다. 명나라 때는 이갑제(里甲制 혹은 保甲制)를 시행하였는데, 농업종사자는 해당 이(里)를 벗어나서 활동해서는 안 되며, 아침에 나갔다가 해 지기 전에 들어와야 하며, 모든 행위를 상호 공개해야 하고, 멀리 떠날 경우 향을 떠나는 증명서를 가지고 가야 했다.
그러고 보면 신중국 수립 이후 새로운 호적제도가 시행되었다고 하지만 전통역사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 중국이 시행중인 호적제도(중화인민공화국호적등록조례·1958.1.9)를 보면 농민의 도시진입과 도시 간 인구이동을 법률로 제한하는 것이 골자이다. 즉 도시와 농촌 사이에 높은 장벽을 쌓았다는 점에서 고대제도의 모방인 것이다. 90년대 들어 중국정부는 호적관리제도를 일부 수정하여 농촌인구가 도시호구를 가질 수 있도록 길을 텄다. 신생아는 부모의 성씨 중 하나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별거부부의 호구문제도 완화했다. 남자 60세, 여자 55세 이상인 자 가운데 자식이 없거나, 도시에 있는 자식에게 의탁해야 할 경우 해당도시에 호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도시지역에 투자하거나 주택구입을 한 공민과 함께 사는 직계친속, 도시에 합법적이고 고정된 주소와 합법적이고 안정된 직업이나 생활근원이 있는 사람, 일정한 연한을 도시에서 거주하고 당지 정부의 유관규정에 부합되는 사람에게는 해당도시의 호적을 부여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중국의 고민은 남았다. 인구이동을 어떻게 처리해야하는가의 문제이다. 현재 중국은 인구의 도시이동을 억제하기도 어려운 상황이고,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도시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는 농촌인구의 도시유입이 필수적이지만 도시인구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면 농촌인구의 도시인구화를 막아야 한다. 이미 중국의 도시에는 농촌에서 유입된 농민공들의 문제가 보편화되었고, 이들 중 소위 출세한 자들이 속출함으로써 기존 호적제도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